
14세에 일본에 와 후쿠오카현에서 야간 중학교를 졸업.
그 후 메이지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지만 영어교사의 길은 한국 국적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의 속에서 들은 이토카와 히데오 씨의 강연에서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재현은 불가」라고 하는 말을 언급해, 이후 바이올린 제작에 뜻을 둔다.
The story
– 내 인생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꿈이다. –
그만 돌아가.여기 있으면 일이 안 되는 거야.
제발 부탁해요!!
나는 필사적이었다.제자로 삼지 않겠느냐고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처음엔 제자의 말을 좋아하던 솜씨 좋은 바이올린 장인은 내가 조선에서 왔다는 걸 알자마자 태도가 바뀌었다.
“모델링 보여줄 테니까 이만 돌아가 줘!”
나는 서둘러, 그러나 섬세하게 모든 것을 베꼈다.
그렇게 옮겨 쓴 종이틀을 바탕으로 나는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독학으로 제로부터 만드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건 무리일 수밖에 없지. ”
“이건 도저히 바이올린이라고 부를 만한 물건이 아니야”
“도쿄에서 구질구질한 놈이 와서 뭔가 잡동사니를 만들고 있어.”
주위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복잡한 바이올린 구조를 애송이들이 하물며 독학으로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느냐고.
그러나 어딜 가나 조선인이잖아라며 제자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나는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태어나지 않은 나는 일할 곳이 없어 하루하루의 생활도 힘들 정도로 가난했다.
집도 없어 밤에는 역에서 자고 생활비는 강바닥에서 건진 자갈을 팔아 벌었다.
그 정도의 고생을 해도 어머니의 눈물을 등에 업고 14세에 홀로 일본에 온 나는 쉽게 돌아갈 수 없었다.
구할 수 있는 바이올린에 관한 책은 다 읽었다.
지렁이 분말과 매미 빠진 자루, 인간 똥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시험했다.
소재가 될 나무와 염료를 찾아 아마존 정글을 헤매기도 했다.
시련이 수없이 찾아왔고 마치 끝없는 미로를 헤매는 듯한 고달픈 삶이 이어졌다.
그래도 난 돌진했다.
매일매일 연구를 거듭했다.그것은 매우 긴 세월이었다.
모든 것은 최고의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서
1976년
그렇게 33년의 세월이 흘러 숙식을 잊고 치달린 노력은 ‘미국 국제 악기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부문 중 5개 부문 금상이라는 전인미답의 결과로 되돌아왔다.
그의 바이올린이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Award
1976년 제작한 바이올린이 미국의 ‘미국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부문 중 5개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1984년에, 미국 바이올린 제작 협회에서 “무감사 제작가”(Hors Concours)의 인정과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The History of Jin
1956년
메이지대학 영문과를 졸업후 나가노현 기소후쿠시마 기소마치에서 바이올린 제작을 독습
1978년
미국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 금메달 수상
1984년
미국 바이올린 제작자 협회에서 무감사 제작가의 특별 인정과 마스터 메이커의 칭호 수여.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불리는
1998년
일본문화진흥회 국제예술문화상 수상
2001년
도쿄도 조후시로부터 시정기능공로상 수상
2002년
해협 건너는 바이올린 (자서전) 하데쇼보 신사
2005년
키조후쿠시마초로부터 명예마을민 칭호기, 수상
2007년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 (자서전) 하출문고 출판
2008년
산토모사 출판 고교 2학년용 교과서 「COSMOS Ⅱ」에 자서전 게재
2008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상 수상
2012년
사망.